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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인문학(2)- 전쟁의 역사와 함께한 커피

전 세계 전쟁의 역사 속 뜨겁게 끓어오른 커피 이야기

2018.11.16. 오전 10:00 |카테고리 : Coffee Story

“내게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진한 커피, 아주 진한 커피이다. 커피는 내게 온기를 주고, 특이한 힘과 기쁨과 쾌락이 동반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프랑스의 위대한 정복자 나폴레옹이 커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한 말로, 그가 지독한 커피 애호가였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문장이다. 평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어 커피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될 이야기다.

그 매혹적인 향미와 진한 커피 맛 때문이었을지 카페인이 가지고 있는 중독성과 효력 때문이었을지, 커피는 의도치 않게 전 세계 전쟁의 역사 속에 항상 함께 했다. 커피를 두고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카페인의 효력을 이용해 오랜 시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전술로 커피를 음용하기도 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어두운 역사 속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바리스타룰스 커피인문학

shutterstock.com
 

‘악마의 음료’로 칭해지던 커피가 세례를 받기까지

바리스타룰스 터키시 커피

처음 유럽권에 전해진 커피의 형태, 터키시 커피/shutterstock.com

커피가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된 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력한 설은 십자군 전쟁 때라고 알려져 있다. 11세기 말부터 약 200년간 유럽의 십자군들은 이슬람 지역으로 8차례의 침략했고, 이때 이슬람 지역에서 커피를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에서는 이슬람교의 음료로 알려진 커피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많은 교인들은 커피가 유행하는 세태에 대해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 8세에게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지정하여 커피의 음용을 금지시키도록 탄원했다. 하지만 커피를 맛본 이라면 커피의 매력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황은 이미 향기로운 향과 맛을 지닌 커피에 매혹되고 난 이후였고, 금지령은커녕 커피에게 세례를 내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커피는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문을 열었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커피 하우스가 생겨났다. 특히 영국에서는 2,000여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길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인기가 절정을 이루면 위기의 순간은 한 번쯤 찾아온다. 17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왕 찰스 2세가 커피 하우스는 혁명의 발원지라는 정치적 이유를 들며 영국 내 모든 커피 하우스를 폐쇄하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법령이 발효되기 전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유럽인들은 여러 이유로 이교도의 음료인 커피를 퇴출시키려 노력하였음에도 커피의 매력에 빠진 대중들 사이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대항해 시대에서 커피 전쟁까지

바리스타룰스 커피인문학 노예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조성되었던 식민지 모습/shutterstock.com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이어진 대항해 시대에서 커피가 노예 무역의 상품 중 하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처음부터 커피가 식민지 개척 시대의 문을 연 중심에 있던 상품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지난 콘텐츠*에서 네덜란드가 커피의 상품성을 알아채고 커피 산지들을 식민지로 삼아 대규모 플랜테이션 조성에 앞장 섰다는 이야기는 이미 다룬 바 있다.

* 커피의 상품성을 일찍이 알아챈 네덜란드 이야기가 알고 싶다면>> ‘커피숍’에 커피가 없는 나라, 네덜란드

노예무역이 성황을 이루었을 당시 주된 교역품은 설탕의 원료가 된 사탕수수였다. 그러던 중 1805년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함대에 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선박이 묶이면서 배편이 부족해 서인도제도에서 싣고 오던 설탕 유입이 차단되고 말았다. 오히려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들은 설탕 공급을 받게 될 수 없게 되어 곤란에 처하게 됐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사탕수수가 아닌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이 기술로 사탕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사탕수수 가격이 떨어지면서 사탕수수는 더 이상 매력적인 무역상품이 아니게 됐다.

바리스타룰스 커피인문학 플랜테이션

커피 플렌테이션/shutterstock.com

이 시기는 유럽 전역에 카페들이 차례로 문을 열며 본격적으로 커피의 수요량이 폭증한 시기와 맞물렸다. 사탕수수를 대체할 무역 상품에 대한 필요와 커피에 대한 수요 증가. 이 두 상황이 맞물려 결과적으로 커피의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커피가 사탕수수를 대신해 유럽 국가들에게 부를 안겨주는 새로운 상품으로 급부상했다. 커피 공급원은 여전히 예멘뿐이었기에 서구 열강들은 그 외 지역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공급원을 늘려가고자 했다. 네덜란드를 선두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강국들의 커피 재배 경쟁이 시작되며 노예 무역의 참혹사는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른 게 커피?

바리스타룰스 커피인문학 링컨 남북전쟁

남북 전쟁 중 북군을 이끈 링컨 대통령/shutterstock.com

커피가 세계 전쟁 속 힘을 발휘한 건 비단 유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커피가 전쟁의 역사와 함께 했는지 알아보자.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발발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발현된 커피의 위력은 대단했다. 북군의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했고, 그 결과 남군은 전쟁 내내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커피 금단 현상으로 인해 남군은 고구마나 사탕무를 진하게 볶아 물에 넣어 끓여 마시기도 했지만, 카페인 빠진 음료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담배 생산지와 인접해 있던 남군은 휴전이 이어질 때면 담배와 커피를 맞바꾸자고 북군에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이야기는 단순히 ‘남군이 커피를 마시지 못해 갈증을 느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혹자는 커피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한다. 실제로 북군을 이끈 벤저민 버틀러(Benjamin F. Butler) 장군은 다른 부대 장군들에게 “병사들이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그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커피 음용을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병사들에게 물통에 커피를 담아 수시로 마시게 하면서 각성 상태가 극에 달했을 때 공격을 지시하는 것을 전술로 삼았다. ‘커피 전술’ 덕분인지 남북전쟁의 전세는 북군 쪽으로 기울었고 승전할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참혹하다. 그 어두운 역사에 커피가 함께 했었다고 해서 누가 커피를 탓할 수 있겠는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새로운 음료, 커피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욕심이 넘쳐흘렀을 뿐. 오히려 하루의 피로를 덜어내고 향긋한 향미를 선사하는 선물 같은 커피를 전쟁의 수단 혹은 비참한 과거 속에 자리하게 한 인류를 탓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커피가 만인의 마음을 훔칠 만큼 전 세계를 통틀어, 전 세대를 아울러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 자료]
커피인문학, 박영순, 인물과사상사, 2017.
커피 향 가득한 THE COFFEE BOOK, 이현구, 지식과감성,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