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우연히 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천천히 걷다가 어느 집 화단에서 나는 꽃향기와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들을 들었을 것이고 덤으로 모퉁이 한 켠의 작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은은한 커피 향기도 느꼈을 것이다. 빠르게 달릴 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 했던 오감을 자극하는 갖가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며 더없이 천천히 시간을 음미했을 것이다. 이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모든 것에는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커피 또한 마찬가지. 원두의 모든 것을 천천히 훑어 내려와 마침내 한 방울의 결실로 모여 만들어지는 커피, ‘콜드브루’가 바로 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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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Cold Brew)는 우리에게 더치 커피(Dutch Coffee)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풍의 커피라는 뜻의 더치 커피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운반해 가는 과정에서 장기간의 항해 동안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일본 상인들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에 무게가 많이 실리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이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는 문헌도 없을뿐더러 영문표기인 ‘Dutch Coffee’는 상표명, 혹은 초콜릿과 깔루아, 아이리시 위스키와 커피를 섞은 칵테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더치 커피’보다는 찬물에 우려낸다는 뜻의 ‘Cold Brew’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콜드브루 커피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침전식과 침출식으로 나뉜다. 침전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용기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로 원두를 천천히 적셔 추출하는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용기에 분쇄한 원두에 정수된 찬물을 넣고 4~8시간 정도 침지시킨 뒤 원두찌꺼기를 필터로 걸러서 마시는 침출식이다. 이 추출법은 특별한 기구 없이도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프렌치프레스를 활용하여 추출이 가능하며 분쇄된 원두와 물을 붓고 하룻밤 정도 냉장고에 숙성시킨 뒤 필터에 걸러내면 훌륭한 콜드브루가 완성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긴 추출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데 바로 이점이 콜드브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보통 3~4분 안에 추출되는 기존 방식과는 달리 상온의 물이 커피가루를 적시면서 추출되기 때문에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12~24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향기는 많이 옅어지지만 기존 커피와는 다른 부드럽고 독특한 향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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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 커피는 얼음에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추출된 커피는 시간이 지나면 향기와 풍미를 잃는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식을 뒤집는 커피가 바로 콜드브루다. 콜드브루는 보관이 가능한 커피로, 처음부터 저온으로 추출하기 때문에 추출 이후에도 맛의 변화가 거의 없다. 오히려 바로 마실 때보다 숙성한 뒤에 마시는 것을 권장할 정도. 추출 직후 3~4일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치면 더욱 깊이 있는 향미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추출된 커피는 물이나 얼음, 우유를 넣어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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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는 추출 방식 특성상 오랫동안 한 곳에 추출 도구가 놓여 있어야 하므로 일종의 인테리어적 소품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상해보라. 당신의 집 거실에 유려한 플라스크와 가느다란 물줄기를 통해 한 방울씩 추출되고 있는 커피가 있는 모습을.
그렇지만 초기에는 이 과학실험을 연상케 하는 플라스크와 유리관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습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과거에 비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집에서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된 추출기구도 있으며, 심지어 가지고 있는 커피 추출도구를 창의적인 방법으로 활용해 직접 콜드브루 도구를 만들어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콜드브루는 원리가 단순하고 어렵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집에서도 콜드브루에 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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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1분에 30~40방울이 떨어질 정도의 속도가 적당하다
자신의 상황에 맞는 콜드브루 추출 기구를 준비했다면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콜드브루는 추출하는 기구에 따라서 조금씩 다루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먼저 원두는 에스프레소와 핸드드립 사이의 굵기를 기준으로 삼는데 개인의 취향에 따라 굵거나 가늘게 조절하면 된다. 다만 너무 굵게 분쇄한 원두를 콜드브루하면 물이 쉽게 통과하여 제대로 추출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또한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물이 고이는 상태가 되면 과다추출이 되므로 추출 기구에 알맞은 양의 물을 붓고 이 물이 1분에 30~40방울씩 떨어질 수 있도록 도구를 조절해야 한다. 보통 커피 60g에 물 500ml가 적당한 비율이다.
이렇게 추출된 콜드브루 커피의 맛은 일반적으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만드는 커피보다 쓴맛이 덜하고 원두의 풍미를 잘 살린다고 알려져 있다. 결과물은 원두의 종류, 분쇄도, 추출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 이 조건들의 조합을 잘 맞추면 개인 취향에 맞는 콜드브루 커피를 추출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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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한 잔의 커피가 된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커피, 콜드브루. 조급한 마음이 있으면 결코 이 커피를 즐길 수 없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맛있는 커피를 기다리는 설렘을 즐겨보시라. 잠시도 쉴 틈을 허용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시간이 만들어낸 귀한 커피 한 잔으로 일상에 지친 그대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현대에 꼭 필요한 매력적인 커피일 것이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한번 생각해보라. 에스프레소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면 가끔씩은 콜드브루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것은 어떨까? 선택은 언제나 그렇듯, 당신의 몫이다.
[참고 자료]
아네트 몰배르. 커피중독. 최가영(역). 서울: 시그마북스, 2015.
김용식. “더치커피 Dutch coffee”. ESSEN. 네이버매거진. 2014
강승훈. “시간을 마신다, 더치커피”. Coffee&Tea. 네이버캐스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