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티 커피’로 대변되는 제 3의 물결이 전세계 커피 시장을 휩쓰는 가운데, 커피 체인의 대명사인 ‘스타벅스(Starbucks)’의 아성을 위협하는 도전자로 주목 받는 기업이 있다. 바로 ‘블루보틀(Blue Bottle)’이다. 단일 품종의 커피 생두를 핸드드립으로 정성껏 내려 고객에게 제공하는 블루보틀 커피는 기존의 보편화되고 빠른 서비스를 추구하던 미국 커피 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같은 성공에 대해 블루보틀의 창업자인 제임스 프리먼(James Freeman)은 자신의 저서 ‘블루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The Blue Bottle Craft of Coffee)’에서 “오랜 전통이 살아 있는 일본의 카페 문화가 블루보틀이 제조하는 커피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섬세하고 우아한 커피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일본”이라고 덧붙였다. 창업자의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블루보틀은 지난 2007년부터 일본 커피 기구와 추출 기법을 도입했고, 미국 외 국가로는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직영매장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Saaleha Bamjee/flickr
일본 도쿄 블루보틀 직영 매장(좌), 정성스럽게 내리는 일본의 핸드드립 커피(우)
그렇다면, 일본의 커피는 왜 그렇게 특별한가? 독특한 문화라도 있는 것일까? 그 전에 오랜 전통을 가진 일본의 다도 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다도에 입문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은 ‘평생에서 단 한번의 만남’을 의미하는 말로, ‘차를 내는 주인과 손님은 그 순간이 일생의 단 한번의 만남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일본 다도 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다. 이러한 다도 문화의 미학이 당연히 커피 문화에도 이어졌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한 잔을 대접하더라도, 한 잔을 대접받더라도, 그 순간에 충실하라는 이 과정 중심의 사상은 일본의 커피 문화를 ‘핸드드립’ 커피 중심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스페셜티 커피 시장으로 우뚝 서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즉, 어찌 보면 일본은 지금의 제 3의 물결 커피가 두각을 나타내는 커피 문화에 대해 사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앞서 말했던 블루보틀 사례처럼 일본의 커피와 카페 문화가 기업에게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18세기 초 일본에 처음 소개된 커피는 그 발전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삶뿐 아니라 세계 커피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현재 일본의 커피 문화는 아시아의 최고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일본 최초의 커피 하우스, 세계 최초의 커피 프랜차이즈 카페, 그리고 현재의 일본의 스페셜티 커피의 흐름까지 바리스타룰스와 함께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일본 지식인의 사교의 장, 최초의 커피하우스 ‘가히차칸’
일본에 처음 커피를 소개한 사람은 네덜란드 무역상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700년경, 그리스도교 금지와 무역 통제를 위해 쇄국정책을 펼친 일본은 나가사키 인근의 데지마섬을 네덜란드인들과의 제한된 교역장소로 삼았다. 이곳은 상인, 통역관, 관리 등 소수의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처음 일본에서 커피를 마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외국인들이나 그들과 접촉했던 사람들만 마시던 커피가 서서히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54년 개항 이후다. 개항으로 인해 일본 본토에도 방문할 수 있었던 외국 상인들이 자연스럽게 커피를 들여왔고, 이들과 접촉이 많은 유학생, 시찰단, 여행가들이 서양의 식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커피 문화도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사진 출처: http://blog.goo.ne.jp/londonbuster/e/24b94a453588bab69abb0ee658066f73)
일본 최초의 커피 하우스 ‘가히차칸’의 창업자 ‘초나가요시’
그로부터 30년 후인 1888년 4월 23일, 한 때 교육자 및 외무성 관리로 일했던 초나가요시(鄭永寧)가 도쿄 중심부에 일본 최초의 커피하우스 가히차칸(可否茶館)을 열었다. 이는 커피뿐 아니라 쿠바산 담배, 술, 빵과 버터가 준비되어있는 제대로 된 커피하우스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커피하우스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새로운 지식을 나누는 장소가 되길 꿈꿨지만 불행히도 사회적 환경과 사업 수완의 부재로 커피하우스는 5년 만에 파산한다.(국내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얼마 전 소개한 손탁 호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가히차칸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사교의 장으로 커피를 소개하고 활용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가히차칸 이후 일본에는 서양 카페 문화를 일본화시킨 전통적인 커피숍 키샤텐(喫茶店)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장인 정신이 투철한 일본에서 이들은 직접 로스팅을 하고, 손수 커피를 내리는 핸드드립 추출법을 고수하는 등 다른 나라와는 조금 다르게 커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화는 꾸준히 이어져서 현재 일본의 카페는 저마다 각양각색의 특색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전세계에서 방문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최초의 프랜차이즈, 존레논과 오노요코가 사랑한 카페 파울리스타
도쿄의 긴자 거리에 가면 무려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아주 유서 깊은 카페가 있다. 긴 역사뿐 아니라 존 레논(John Lennon)과 오노요코가 사랑한 곳으로도 유명한 ‘카페 파울리스타(Café Paulista)’다.
Yusuke Kawasaki/flickr.com, @en.wikimedia.org
카페 파울리스트 내부와 로고(좌), 존레논과 오노요코(우)
1911년, 일본 1세대 브라질 이민자였던 미즈노류(水野龍)가 연 이 카페는 그래서 사실 브라질과 연관이 깊다. 19세기 전 세계적인 커피 소비량 증가로, 브라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커피 생산에 뛰어들었지만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커피 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하게 되고, 브라질 커피 가격은 대폭락한다.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미즈노류는 브라질 정부에 커피 원두를 일본에 수출할 것을 제안하여 브라질 정부로부터 얻은 대량의 공짜 커피 원두를 밑천으로 긴자 거리에 카페 파울리스타를 개업한다. 원두 가격이 없으니 커피 가격이 저렴할 테고, 그러니 곧 대학생과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카페 파울리스타는 곧 나고야, 고베 등 일본 대도시에 총 23개의 분점을 내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일본에서 탄생한 것이다.
핸드드립에서 사이폰까지, 아시아 넘어선 커피 트렌드의 선구자
일본인들에게 진짜 커피는 그들의 문화대로, 바리스타가 한 잔씩 정성껏 내려주는 커피다. 도쿄와 교토의 이름난 카페를 가면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원두를 선택하고, 볶고, 내린다. 완벽한 궁합의 커피인 것이다.
하리오 드리퍼를 이용한 핸드 드립 커피
일본의 커피 및 카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주목할 점은 자국의 문화에 타국의 음료인 커피를 그대로 녹여내 새로운 산업을 꽃 피웠다는 데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누누이 이야기하는 핸드드립인데, 오랜 기간 핸드드립을 연구한 일본인들은 독일에서 고안된 멜리타 드리퍼를 발전시켰고 칼리타, 고노, 하리오와 같은 브랜드를 개발했다. 드리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생각을 만드는 커피, 핸드드립 커피 편’을 참고하시라.
사이폰 커피
일본 카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이폰 커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을 끓일 때 발생하는 수증기의 움직임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도구인 사이폰은 19세기 유럽에서 처음 개발되었다. 하지만 추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관리가 번거로워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1925년에 일본 커피 기기 브랜드 중 하나인 고노(Kono)가 기존의 도구를 개량하고 ‘사이폰’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세계 스페셜티 커피시장 NO.1, 일본
물론 추출법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커피의 핵심이자 기준은 원두다. 일본 커피 시장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찾는 소비자들의 니즈는 꾸준히 늘고 있는데, 국제 커피 협회(ICO)의 2017년 1월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간(2015년10월∼2016년9월 통계) 일본은 유럽연합과 미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커피를 수입하고 소비하는 국가다. 하지만 스페셜티 분야에 있어서는 단연 1위다. 일본 스페셜티 커피 협회 (SCAJ,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of Japan, 이하 SCAJ로 표기)가 실시한 시장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스페셜티 시장 규모는 연간 커피 소비의 약 7%로 추정되며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라고 한다.
스페셜티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비싼 원두를 소비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에 SCAJ는 커피 애호가들과 생산자, 그리고 관련 산업 종사자들을 위해 매년 가을, 도쿄에서 커피 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 최고 스페셜티 커피 시장을 보유한 나라인 만큼 우리 나라와는 또 다른 커피 트렌드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이다. 올해 SCAJ 박람회는 ‘혁신의 시대’라는 주제로 9월 20일부터 22일 까지 도쿄에서 열린다. 바리스타룰스에서도 전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커피 트렌드의 집결지, SCAJ 박람회에 방문하기로 했다. 따라서 다음 컨텐츠에서는 바리스타룰스가 SCAJ 박람회에서 경험한 일본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참고자료]
블루 보틀 크래프트 오브 커피, 제임스 프리먼 외, 한스미디어 2016
일본 엄청나게 가깝지만 의외로 낯선, 후촨안, 애플북스 2016
커피 브루잉, 도형수, 아이비라인 2014
루디's 커피의 세계, 세계의 커피 2, 김재현, 스펙트럼북스 2009
그들은 소비한다, 더 ‘좋은’ 커피를, 김양균, Coffee & Tea 9월호
“일본의 커피역사가 우리보다 170년이 앞선다?”, 한국 커피의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Café Paulista, TOKYO, JAPAN Food Escape 2015.9
인스턴트 커피 커피이야기, 네이버 지식백과
커피수입 매년 최고치 경신, 관세청 2017.6